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 공동,'제1차 자유시민포럼' 개최
[국회=글로벌뉴스통신]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원장 정윤재)은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와 공동으로 9월26일(목)오후 대한민국헌정회 1층 강당에서 '제1차 자유시민포럼'을 개최하였다.
제1부 개회식은 권행완 박사(건국대 겸임교수)사회로 정윤재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 원장의 개회사,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의 축사,이희주 (평전 명성황후 저자)서경대 명예교수가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제2부 자유시민 토론에는 이택휘 전 서울교대 총장의 사회로 이재석 인천대 명예교수,박광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연구위원,정명애 시니어배움터 락 대표,한만길 전 한국교육개발원 석좌연구위원,이원택 전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백정종 서울자유길학교 가이던스,이선정 우리문화진흥원 연구위원,임유나 서울자유길학교 가이던스,유지후 진명여고2년 역사동아리 회원,강주연 진명여고1년 역사동아리회원이 함께 하였다.
정윤재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 원장은 개회사에서 "'주도력(주인의식, 도덕성, 역사의식) 시민교육과 뿌리 깊은 대한민국'을 지향하는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이 대한민국헌정회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1차 자유시민포럼에 참석하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1919년의 3.1혁명은 우리 민족 최초의 근대적 시민혁명으로, 대한민국이 자유주의적 민주공화국으로 시발(始發)하게 된 매우 중요한 정치적 계기였다. 그런 점에서 3.1혁명은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뿌리이며, 우리 근대사의 '노른자위'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은 '3.1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 지배자들과, 그들에 의해 순치된 부류들은 '3.1혁명'은 ‘무지하고 비조직적인’ 한국인들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폄훼했으며, '3.1혁명'을 ‘3.1운동'으로 그 의미를 약화시켜 호칭하도록 유도하고 강제했던 것이다. 그리고 1948년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여했던 유진오, 신익희, 이승만 등의 인사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3.1혁명'을 언급하며 헌법 내용을 논의했는데, 그 과정에서 ‘3.1운동’이란 용어가 그 전문(前文)에 등장했다. 이후 을유광복 100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까지도 이에 대한 비판과 시정을 위한 적극적인 이니셔티브는 학계와 정계 어느 곳에서도 효과적으로 강구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자유시민포럼 1차 주제를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한 것도 이 같은 문제의식과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시민혁명'의 소산인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적 뿌리를 확인하며,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의 좌표를 모색한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에서는 3.1혁명 전후사 속의 주요 인물들과 사건들을 주제로 하는 '담화(談話)'의 기회를 계속 마련할 계획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적 뿌리를 재확인하고 효율적인 민주적 국가경영이 정착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정대철 대한민국헌정회장 회장은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이 헌정회와 공동으로 제1차 자유시민포럼을 열게 된 것을 축하드린다.우리의 근현대사에 대한 심각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경제나 과학기술면에서는 국력이 상위권이지만 정치와 정치리더십면에서는 하위그룹에 속한다는 조사결과까지 발표된 바 있다.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주의 시민혁명이었던 1919년의 3.1혁명 전후사로 파악하면서 그 시기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에 대한 재조명으로 <역사 바로 세우기>에 노력하고 계신 것은 시의적절한 시도다.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이후 1919년 3.1혁명까지 25년을 '희망과 도전의 시기'로 파악하고 이 시기동안의 민주공화주의적 개명에 입각한 계몽활동과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시도하고 있어 의미는 더욱 크다.우리 정치의 <역사적 뿌리>인 <3.1혁명>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분산되고 서로에 대한 적대적 전쟁만 하고 있다. 이러한 폐단이 시급하게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국시민리더십학습원이 시도하는 자유시민포럼은 정말 필요하다.이희주 교수께서 발표하시는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이란 주제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자유시민포럼이 성공리에 이어져 우리 <민족사를 재정립>하고 역사의식을 새롭게하는 데 기여하기를 바란다."라고 축사를 하였다.
이희주(명성황후평전 저자)서경대 명예교수는 발제에서 "명성황후 평가의 명암,명성황후 가문 바로 알기,고종의 두 얼굴과 명성황후의 내조,왜 일제는 명성황후를 살해했는가?,명성황후 재평가 하기(외국인 기록과 사료분석,정세 상황적인 분석),명성황후 죽음의 의미과 마무리"를 하였다.
서문 요약에서 명성황후, '조선의 혼'으로 살아나다',"명성황후는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비이며, 3대 황제를 지닌 순종의 모후이다. 명성황후는 오늘날 한국인에게 상반된 평가를 받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199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은 명성황후를 '시아버지 대원군과 권력투쟁을 하였던 패륜의 여성', '고종을 마음대로 조종하여 국정을 농단한 인물', '친정 세력을 곁에다 두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던 인물', '조선을 망하게 한 여성'등 차가운 시선으로 보았다.1981년 출간된 이태영 선생의 [차라리 민비를 변호함]이다. 선생은 '한국 국민의 도리와 변호사의 사명감'으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선생은 당대의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인습에 매몰되지 않았으며, 남녀평등 의식을 고취하고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명성황후를 조명하였다.이 평전은 명성황후의 삶을 대상 내재적인 연구 방법으로 규명하고자 하였다. 인간에게 생존욕망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생존 욕망의 형태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 어머니의 대다수 경우 그러하다. 그 욕망의 형태 속에서 자식과 남편의 생존이 자신의 삶보다 더 우선한다. 바로 한국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이다.순종의 모후이자 고종의 비 명성황후의 삶은 바로 한국 어머니의 삶이었으며, 조선왕조의 운명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것이 평전의 출발점이다.이 평전은 자료비판에 근거하여, 실체적 접근에 주목하였다.명성황후의 삶은 그 자체가 정치적이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 운명의 정치 현장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긴박하게 살았던 명성황후의 삶은 '여성'과 '정치'라는 두 영역에 중층적으로 녹여져 있다. 특히 여성의 특수성을 반영시키지 않고서는 '명성황후의 정치적인 삶'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초대 미국 푸트공사 부인을 비롯한 외국인 여성을 만나기 위해 만든 '원유회'를 기존 연구물에서는 국고가 낭비되는 파티나 유흥으로 보았으나, 필자는 이를 효율적인 외교행위의 수단으로 해석하였다...원유회를 외교 행위의 수단으로 해석할 때,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지닌 명성황후의 정치행위가 보다 실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서 "이 평전은 명성황후의 삶을 다섯 가지 관점에서 추적하였다. 첫째, 명성황후는 고아한 품격과 냉철한 지성을 갖춘 여성이었다.둘째, 고종과 순종, 그리고 조선의 생존과 수호를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명성황후의 삶 속에는 '고조의 대리표적'의 형태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셋째, 정치적 리얼리즘 관점에서 명성황후의 정치적 삶을 조명하였다.
특히 일본은 다양한 국내 세력과 정파 간의 분열을 악용하여,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더욱 왜곡시켜 나갔다...대표적인 사례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갈등 구도'이다. 또한 명성황후와 민씨 세력을 동일시하는 시각도 문제이다.넷째, 직접 만난 외국인의 기록과 명성황후의 편지글을 통해 명성황후의 삶을 추적하였다.명성황후의 내조 형태는 편지글에 잘 드러나 있다.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균형감과 솔직함 그리고 담대한 면을 지녔고, 고종의 보필자로서 충실한 역할을 하고 있다.다섯째,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 '죽음의 정치'로 전환된 '명성황후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였다.이 평전의 목적은 인간 생존의 '보편성'과 개체성', 그리고 '여성'과 '정치'관점에서 명성황후의 삶을 조명하는 것이다."라고 강연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