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김인구작가의 역사와 함께하는 “칼리디자인”지상특별전시회 (제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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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김인구작가의 역사와 함께하는 “칼리디자인”지상특별전시회 (제2편 )
  • 김진홍 논설위원장
  • 승인 2021.06.0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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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김인구 작가) 김인구 작가는 전서체 "우 (右)"자에서 문인상의 모습을 발견, 스토리를 담아  Kallidesign.        (길 Road, Acrylic, Pigment Print,40×40cm)
(사진제공: 김인구 작가) 김인구 작가는 전서체 "우 (右)"자에서 문인상의 모습을 발견, 스토리를 담아  Kallidesign.        (길 Road, Acrylic, Pigment Print,40×40cm)

[서울=글로벌뉴스통신]2편에서 소개되는 “칼리디자인(Kallidesign)은 영조시대  전서체의 대가 지수재 유척기  (知守齋 俞拓基, 1691~1767년) 우(右 )자의 전서체 글을 소개한다. 작가에게 전서체 “우(右)” 글자는 온전한 ‘길 Road’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바라본 “우(右)”자는 명신 (名臣 ) 우의정 김구 (金構 ) 묘소를 지키고 서있는 문인상 (실제로는 石羊 1 쌍 )으로 보여  Kailldesign  할 수 있었다고 한다.마치 그 시대를 지금의 시대에 와서 설명하고자하는 아니 할 말은 많아도 아무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온 재상의 삶을 혼자서 이해라도 해주듯이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있는 문인상의 무게와 책임감을 전서체 우(右)자에서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제공: 김인구 작가) 올림픽공원 몽촌토성내 충헌공    김구 묘역및 신도비(서울시 문화재 제59호)
(사진제공: 김인구 작가) 올림픽공원 몽촌토성내 충헌공    김구 묘역및 신도비(서울시 문화재 제59호)

우의정 김구 (金構, 1649~1704 년 )는 숙종 시대의 명신이다. 당시는 우리가 짧게나마 익숙하게 아는 당쟁으로 노론·소론에 의한 나라의 많은 인재들이 죽음으로 내 몰리던가 아니면 유배지로 귀양살이를 떠나야만 했다. 즉 군신간의 대립과 신하들 상호간 대립이 첨예하던 시대였다. 결국 숙종은 정국운영을 탕평 (蕩平)으로 그 해결방안을 모색하였고 탕평을 통해 실질적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우의정  金構 (김구)가 명신이라 일컫는 것은 당시 노론과 소론의 당쟁으로 치닫는 정국을 안정시키려 부단히 노력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당쟁을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나라를 잃게 만든 망국의 원인으로 치부하곤 한다 . 물론 한 원인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시 17~18  세기 서구유럽의 근대화 과정과 일본의 개항과정 그리고 미국이 독립 과정을 살펴본다면 총과 칼로 이룩한 역사 발전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조선은 붓과 종이가 이를 대신하였고 좀 더 이른 개항과 자본주의 이행과정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은 역사속 되풀이 되는 선진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기회포착의 실패였지 붓과 종이의 잘 못은 아니다.

   (사진제공: 김인구작가)     몽촌토성 성곽길
   (사진제공: 김인구작가)     몽촌토성 성곽길

사대부들은 붓과 종이에 신념을 걸고 아니 목숨을 걸고 싸운 점이 저들 서구열강의 총이나 일본의 칼에 비유될 수 있다. 사대부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던 당쟁의 역사 또한 우리가 서구열강의 총의 역사를 들여다 보듯이 일본의 칼의 역사를 들여다 보듯이 그 시대의 눈으로 동서양을 들여다 봐야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서만 유독 가혹하게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지금의 시각에서 보는 눈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싶다. 김인구 작가는 지수재 유척기의 전서체 우(右)자는 우의정 김구 (金構)의 안타까운 심정을 대변하듯 문인상이 되어 나에게 뚜벅뚜벅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3편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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