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의왕 왕림마을과 청평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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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의왕 왕림마을과 청평사 이야기
  • 김진홍 논설위원장
  • 승인 2022.04.30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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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김씨 김우증(청평군) 사당과 신도비
(사진: 청평군종회) 백운산자락의 300년된 청평군 사당 모습
(사진: 청평군종회) 백운산자락의 300년된 청평군 사당 모습

[의왕=글로벌뉴스통신]김우증(金友罾)은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선전관, 명천현감, 정주목자,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 1742(영조 18)에 병조판서에 증직 되었으며 청평군에 추증되었다.

청풍김씨 왕곡동 입향조(入鄕祖) 이다. 상기 청평사(사당)은 300년 된 사당으로서 1984년경에 중창이 되었다. 매년 불천위 제례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사진: 청평군 종회) 260년된 김우증(청평군) 신도비 모습
(사진: 청평군 종회) 260년된 김우증(청평군) 신도비 모습

김우증은 본관은 청풍김씨이고 자는 희여(希 輿)이다. 군수를 역임한 김극함(金克諴)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靖國)공신 3등에 책훈(策勳)되었다. 그 후 통정대부 행 정주목사(行定州牧使),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1742년(영조 18)에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청평군(淸平君)에 추증되었다. 

(사진:청평군종회) 청평사 및 신도비 
(사진:청평군종회) 청평사 및 신도비 

이때 왕곡동 사방 십리에 사패지(賜牌地)를 하사 받은 것이 왕곡동에 청풍김씨가 뿌리를 내리는 계기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세대에서 특히 판서공파(휘 인백파)에서는 4대 6상, 3대 정승, 부자영상. 판서공 8명, 대제학 2명 등이 탄생되는 등 청풍김씨가 조선시대 3대 명문가문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유명한 인물들은 성리학자 대사성 문의공 김식과 한국경제의 아담 스미스라고 칭했던 대동법을 창안했던 잠곡 김육(영의정)등이 있으며, 근대사에는 독립 운동가였고 상해 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였던 우사 김규식 박사와 독립 운동가로 범제 김규흥, 의병장 김규철이 있고, 그리고 유명한 문학가이자 시인 이였던 김유정, 전 경제부총리를 역임 했던 김유택, 철도청장을 역임했던 김진식 등이 있다. 

(사진: 판서공종회) 김우증 청평군이 심었다는 600년된    일명 정승나무(은행나무)
(사진: 판서공종회) 김우증 청평군이 심었다는 600년된    일명 정승나무(은행나무)

왕곡동 마을입구에는 “왕림마을표지석 및 청풍김씨 묘문비”가 세워져 있으며 김우증 과 관련된 600년 된 은행나무(일명 정승나무)가 자라고 있다.

연산군때 정주 목사를 지낸 청풍김씨 김우증(金友罾) 청평군은 후일 이곳에 정착 하겠다는 증표로서 늘 가지고 다니던 은행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심었다는(1442년)설이 남아있다.

또한  정조대왕이 화성 행차시 이곳에서 잠시 말에서 내려 예의를 차리고 갔다는 하마비(下馬碑)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마을입구 마을 표지석 및 청풍김씨 묘문비모습
마을입구 마을 표지석 및 청풍김씨 묘문비모습

김우증 신도비는 1764년(영조40) 7세손 인백파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가 짓고 8세손 김치인이 글씨를 썼으며, 9세손인 김종정이 전액을 하였다. 김상로와 김치인은 인백파로 지파이고 김종정은 충백파로 종손이다.

비는 방부개석의 형태로 높이 213cm, 너비 65cm, 두께 65cm이다. 청평사는 김우증 선조를 모시는 사당으로 등록 되어있고. 청풍김씨는 경주김씨 시조 알지의 후손인 경순왕의 6子인 태자공의 13세손으로 고려 문화시중 및 청성부원군을 역임했던 김대유(金大猷)를 시조로 두고있으며 조선 시대엔 정승 8명, 대제학 3명, 왕비 2명(정조비 효의왕후, 현종비 명성왕후)등을 배출한 3대 명문가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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