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弘益人間思想 : 사람은 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 (홍인 박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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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弘益人間思想 : 사람은 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 (홍인 박찬희)
  • 희망봉 기자
  • 승인 2013.01.1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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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교육으로 바꿀 수 있다

 1편에서 인간은 神人合一(신인합일)이므로 신과의 同格(동격)이고 神(신)의 분신이라고 하였다.

“神(신)”“人間(인간)”“짐승”이 있는데 신에게는 神性(신성)이 있고, 인간에게는 人性(인성)이 있고, 짐승에게는 獸性(수성)이 있으나, 신에게는 神性(신성)만 있고 짐승에게는 獸性(수성)만 있지만 사람에게는 神性, 人性, 獸性을 다 갖추고 있다. 

 이 세 가지 성품을 다 지니고 있는 사람은 교육을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 人性(인성)을 啓發(계발)하여 훌륭한 人格体(인격체)를 高揚(고양)시킬 수 있고, 또는 교육의 부재로 “人面獸心(인면수심)”이라고 사람의 탈을 쓰고 짐승과 같은 행위를 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인면수심의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또한 사람은 修行(수행)을 통하여 神性(신성)으로 上昇(상승)할 수 있는데, 그 상승의 길을 三一神誥(삼일신고)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止感(지감), 調息(조식), 禁觸(금촉)하고 階萬善(계만선)하고 門萬德(문만덕)하여 有性通功完者(유성통공완자라)야 朝(조)하야 永得快樂(영득쾌락)이리라  

 ①止感은 불교의 수행법을 예로 들자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貪탐, 瞋 진, 癡치 삼독을 멸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貪은 탐욕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라는 뜻이고, 瞋은 성내는 마음을 다스리 라는 뜻이고, 癡는 어리석음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래서 불교의 선방에서는 경전의 글자에 매달리지 말고 의심을 해라 “의심이 크면 깨달음이 크고, 의심이 작으면 깨달음이 작고, 의심이 없으 면 깨달음도 없다.”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삼일신고의 止感은 바로 이와 같은 뜻이다.  

②調息은 숨을 고르게 쉬라는 말인데 이것은 선도의 단전호흡을 말하는 것 이다. <저의 책 1권의 仙道(선도)편을 참조하시면 좋겠다.>

③禁觸은 쾌락을 멀리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요즘 말로 섹스를 탐하지 말라는 뜻이겠고 술과 담배도 금기사항이다. 즉 말초신경을 자극하지 말 고 몸과 마음을 고요하게 수행을 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고 階萬善: 만가지 선의 계단을 오르고, 門萬德: 만가지 덕의 문을 지나 有性通功完者: 오직 본성을 통달하고 공을 완성한 이라야 朝하야 永得快樂: 하나님께 조회하여 영원한 쾌락을 얻으리라.  

 ※ 앞글 禁觸(금촉)에서 말하는 쾌락은 육체적인 쾌락을 말하는 것이고, 영득 쾌락의 쾌락은 정신적인 쾌락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지에 가면 거기가 바로 천국이고 인성을 넘어 신성에 도달을 하게 되는데 이 경지가 神仙(신선) 즉 神人(신인)의 경지이며, 역대 한웅과 단군은 이 경지에 도달을 하 였었다고 보며, 송 호수 박사님은 한웅과 단군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聖人(성인)의 경지를 넘어 神人(신인)이었다고 표현을 한다.  

 이 경지에 이르면 오늘날 종교들이 말하는 극락이고, 천당이다. 우리는 죽어서 천당을 가는 게 아니고 살아서 弘益人間 在世理化 로서 지상천국 을 이룩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이다.

  이와 같이 사람을 교육으로서 내재 되어 있는 獸性(수성)을 멀리하고 人性(인성)을 계발하고 神性(신성)으로 도약하는 것이 弘益人間思想(홍익인간사상)의 가르침 이다. 

 오늘날의 교육은 知識(지식)만을 가르치고 있으므로 人性(인성)이 啓發(계발)이 안 되어 자신이 배운 지식으로 남을 속이고 나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에게 피해를 잎이는 일을 서슴치 않으며 여차하면 獸性(수성)이 발동되어 짐승과 같은 행위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인간은 기계(스마트폰 등)의 노예가 되어 思惟(사유)와 思索(사색)을 안하고 無意識(무의식)적으로 행동함으로 언제고 獸性(수성)이 발동되어 죄악을 죄악으로 認識(인식)을 못하고 저지르게 될 것이다. 

 홍익인간사상 에는 敬天(경천), 崇祖(숭조), 愛人(애인)의 三化(삼화)사상이 있다. 그 중에 숭조가 가장 중심사상이다.

 사람은 背恩忘德(배은망덕)한 놈이 제일 나쁜 놈인데 가령 사기꾼은 피해자에게 접근하여 甘言利說(감언이설)로 돈을 빌려주면 이자를 후하게 쳐 준다던가, 어느 곳에 투자를 하면 배당금을 몇 배를 주겠다는 식으로 꼬이면 피해자는 그 조건이 솔깃하여 받아드리게 된다. 그러므로 피해자에게도 반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배은망덕한 놈은 부모로부터 태어나 그 부모의 보살핌에 의하여 자라서 성인이 되고나서 부모의 恩德(은덕)을 망각하고 배반을 하는 놈 이므로 세상에 이 보다 더 나쁜 놈은 없다. 이것은 부모 자식 관계 뿐 만이 아니고 모든 대인관계에 해당이 되는 말이다.

 우리는 조상이 있음으로 내가 있게 된 것이다. 어느 신앙에서는 조상을 배척하는 것이 근본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 된 것이고 또한 진리가 아니다.  

여기에 티모시 프리크,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예수는 신화다》384페이지 한 구절을 옮겨 본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지혜와 문명의 원천으로 그들의 “조상”을 섬기는 반면, 서구 문화권에서는 조상들을 악마의 숭배자라고 매도해왔다.  

 그것은 서구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서구 문화는 뿌리와 단절 되어 왔다. 15세기에 르네상스, 곧 “재생”이라고 적절히 명명한 기간에 이교 철학을 재발견한 후 비로소, 서구의 문명은 침잠해 들어갔던 미신과 투쟁의 늪에서 기어 올라올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근대에 서구는 과학의 과실을 수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대인들과 달리, 서구인들은 앎과 영성을 같은 미스테리아의 두 국면으로 보지 못했다. 서로 화해할 길이 없는 적대적 관계라고 보았던 것이다.“ 

 공자는 孝(효)는 百行之本(백행지본)”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 효를 알고 효를 실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회생활에서 나를 위하여 남을 해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계신 부모님은 효성의 대상이고, 돌아가신 조상님은 숭배의 대상인 것이다. 세상은 “我나”가 있음으로 세상이 있고 나를 있게 해준 조상이 있음으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불교도, 기독교도 없는 것이다. 그 우선순위를 망각하고 非眞理비진리에 현혹되어 오늘날 인류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단기 4345년 11월 9일 

 檀君의 子孫 弘仁 朴 鑽 羲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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