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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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7)
  • 김태진 기자
  • 승인 2023.04.1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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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 문학평론가 김태진의 서사로 읽는 시문학 살롱, 덧없이 사노라니.

 

덧없이 사노라니 꿈속임을 알지니

-부생자작몽중유(浮生自作夢中遊, 덧없는 생에 스스로 꿈꾸고 사는 것임을 알아차릴지니)

 

莫道始終分兩頭 (막도시종분량두) 처음이라(새해) 끝이라(묵은해) 나누지 말라

冬經春到似年流 (동경춘도사년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은 (어김없는) 세월의 흐름

試看長天何二相 (시간장천하이상) 광활한 하늘을 돌이켜 볼지라도 둘일 수 없나니

浮生自作夢中遊 (부생자작몽중유) 덧없는 생에 스스로 꿈꾸고 사는 것임을 알아차릴지니

 

- 학명선사(鶴鳴禪師, 1867~1929) 선시, 浮生自作夢中遊(부생자작몽중유)

(사진: 김태진 인문학 기록사진) 오래된 암자에서
(사진: 김태진 인문학 기록사진) 오래된 암자에서

학명계종(鶴鳴啓宗)선사는 전라도 변산 월명암 근처에 있는 산내암자 양진암 암주로 불경을 가르치는 강주(講主)이자 선승으로, 계율도 청정하였다. 방랑하던 시절 만해 한용운이 한 때 의탁하여 함께 지냈다. 학명스님은 만해는 물론 석전 박한영 스님과도 가까웠다. 그는 불교의 미래는 젊은 승려들의 도제교육에 있음을 간파, 1928년 내장사에 내장선원을 건립하고 나이가 든 승려가 아닌 어린 소년 사미승(沙彌僧)들을 모아 교육하였다.

〈내장선원규칙〉을 만들어 교학과 함께 농업에 힘쓰고 어려서부터 선풍을 익히고 범패·가무까지 곁들이고 다양하고 이상적이며 자유스러운 가운데 새로운 대중적 승가교육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불교개혁에 대한 지향점이 만해· 석전 등과 상즉상통(相卽相通)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시인 서정주의 1999년 기억을 소환해본다. 그는 서너 살 때 학명선사를 처음 접한 기억을 ‘백학명 스님’이란 짧은 시로 적었다. “할머니는 (중략) 대여섯 살짜리 나를 업으며 걸리며/시오리(十五里) 산길을 걸어 닿던 초파일의 선운사./나는 거기서 늙은 할아버지 중 한 분을 보았는데/늙었으면서도 속눈썹이 계집애처럼 유난히도 길고/그 안의 두 맑은 눈망울은/ 내 마을 친구 중에서도 제일 친한 친구 같아서/곧 안심하고 따라다닐 수가 있었다./뒷날 알고 보니 이 이가 그 백학명 스님으로/만해도 하 답답하면 찾곤 했던 바로 그분이었다.”고 했다.

1920년대에 후학을 양성하던 학명 스님을 대중운동에 동참하려 하산을 권유하려던 만해는 세상의 안팎을 구분하지 말라며 어디에 있던지 꿈속에 사는 삶이란 걸 잊지 말라는 당부 말만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명 스스로 산중에서 신식교육을 하며 민족정기를 함양하며 불교개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만해의 승려취처와 관련하여 학명선사는 “부인이 있거나 자식이 있는 자는 어떤 부류의 대중에 속하는지 명백히 나누라”며 원래 4부 대중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가 생겼는데 이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대책을 세우자고 하였던 것이다. 그 대책은 대처승 또한 현실적 존재인 만큼 위상을 마련, 갈등을 막고 함께 살아갈 방도를 제시한 중도적 방편인 것으로 해석된다. 대단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1929년 8월 월간지《불교》에 발표된 학명스님의 글 일부이다. “근일(近日)에 우리 조선의 승려 되는 자(者)로 말하면 승려라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도 알지 못하고 부처와 조사(佛祖)의 본의가 어떠한 것인지도 알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이 출가 입산하는 날부터 몸만 한적한 운림(雲林)에 집어 던지고 눈은 재물과 이익의 주선(周旋)에 혈안이 되어 …

내가 원하는 바는 우리 법려(法侶)가 오직 도(道)만 닦으며 오직 덕(德)을 밝히며 오직 공심(公心)을 행하며 오직 정도(正道)로 돌아가서 이렇게 이렇게 쉬지 말고 쉬지 말아서 평등한데 이르고 평등을 쓰게 되면 그 깨달음은 무연(無緣)에 계합(契合)하고 다시 유연(有緣)을 제도하리니 그때에는 옛 조사(古祖師)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뿐 아니라 마땅히 불조(佛祖)와 더불어 손을 마주잡고 함께 비로정상(毘盧頂上)에 걸음 걷다가 방초안두(芳草岸頭)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

평소 선사 학명이 살다간 선의 공간은 어떠했던가? 불식(不息)하며 공심(公心)으로 덕화(德化)를 베풀며 불조(佛祖)와 더불어 정도(正道)로 채워 같으리라. 암주 소임을 마친 후 내장사주지로, 선원(禪院)을 세운 선사는 반농반선(半農半禪)을 주창하여, 일[노동]과,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함께해 나가는 불교혁신운동을 펼친 선각자의 면모가 역력하다.

남기신 글은 안타깝게도 학명선사가 1929년 음력 3월 27일 세수 62세를 일기로 입적하였기에 그 전에 써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자후는 오늘날 승속들에게는 무릇 ‘덧없는 생에 스스로 꿈꾸고 사는 것임을 알아차리라’는 경책이 아닐 수 없다. 막론하고 사표이자 전범으로 삼아 이제라도 밖을 향하던 마음을 거두어 오롯이 자기 안을 보며 새기고 되새겨야 하리라.

그 무렵 학명은 자기 모습이 그려진 자화상을 보고 「자찬(自讚)」이라는 시를 썼다. 이 그림 밖 “나는 흰 학”이라면, 그림 속 너는 도대체 누구인가? 만약 그림 속 “네가 만약 흰 학”이라 하면, 그림 밖의 나는 누구인가? 그림 안팎 ‘나’는 같지 않으니, 그럴 때는 어떠한가?

이렇게 묻는 선문답이다. 자문자답이라는 화두참구에 다름 아닌 것이다. 화두가 성성해지니 “필경에 어떠한가?”라 묻고 “봉래산은 높고 월명암은 해묵어 오래되었네.”라며 언하에 현문현답으로 입을 봉한다.

스님은 특이하게도 자찬을 포함, 한시 찬(讚) 7편을 남겼다. 스스로의 경계를 밝힌 「자찬」이기에 학명의 자기경계가 어떠했는지 몰록 궁금해진다. 다만 일화를 보자면 당시 일본 임제종 본산인 원각사 석종인 선사(釋宗演 禪師)가 그를 “조선의 古佛”이라했다는 데서 그의 선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법, 존재[諸法]의 참 모습[實相]을 나타내는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진리(眞理)로 생각하고, 어떤 특정한 원리에 근거한 것인 진리를 배척한다. 그래서 학명선사의 이 시 또한 생멸(生滅)하는 거짓된 나[假我], 망령된 나[妄我]를 버리고 참다운 나[眞我], 큰 나[大我]를 찾겠다는 의지를 잘 표현하고 있고 마침내 스스로 ‘미혹함이 없는 나 밖의 나’ 무아(無我)에 이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학의 날개 짓 처럼 만해 한용운을 향해 ‘어디에 있던지 주인이 되어라’고 소리쳤고, 진리를 향한 끝자락에 마지막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꽃핀 자리가 꽃 진 그 자리이듯 백천간두(百尺竿頭)에 다 버리고 떠나는 진정한 용기를 다지고 있는 모습을 펼쳐 보였음이다.

근자에 봄은 꽃병 들어 ‘화무삼일홍’, 세상에 여남은 꽃조차 좌우를 넘어 천지사방 흔들리니 꿈속 환화(幻花)인 듯... ... 숨죽인 나의 호흡은 긴 침묵으로 이어지나니 이런 때를 당하여 필자는 만해의 사표, 또 한 사람의 도반을 본다.

거룩하다. 꽃 중의 꽃, 거룩한 꽃, 화엄(華嚴)이여!

 

문학평론가 김태진 법학박사는 동아대학교 법무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수석부회장, 국가기관 과거사 진실위원회 사무처장, 국정원 원사편찬실장 등 역임, 공직 30여년 퇴임 후 현재 헌법기관 민주평통 자문위원, 한반도미래전략연구소 소장, NGO 붓다를 사랑하는 사람들 공동대표, 사단법인 만해사상 실천연합 상임감사, 한국공무원불자연합 고문, 한국문인협회(문학평론가· 수필가), 글로벌뉴스통신 문화예술위원장으로 활동 중, 주요저술로는 헌법스케치(1997), 국가기관 과거사 정리 백서(공저 2007), 호국 인왕반야경(공저 2015), 論 아득한 성자(2021), 不二로 만나다 -만해 한용운, 만악 조오현 시세계 (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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