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부천시청)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부천시지회 김석구 을지무공훈장 수훈자 |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부천시지회 김석구 씨는 6.25 당시 가장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의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김 씨는 백마고지 전투 등의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보다 유리한 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백마고지 전투는 그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내가 속한 9사단은 이곳을 확보하고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평야 북쪽의 높이 395m의 산이다. 이 곳을 국군 측이 확보하면 북쪽의 평강 시내까지 관측할 수 있고, 철원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통신과 보급을 확보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곳을 얻기 위해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국군 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전투를 벌였다. 12일 동안 24번의 주인이 바뀌었고, 산등성이에 떨어진 포탄으로 산이 누운 흰말처럼 바뀌었다고 해서 ‘백마고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 (사진제공:부천시청) 6.25 전쟁, 베트남 전쟁 두번의 전쟁에 참가한 김석구씨 |
김 씨는 29연대 1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전투가 벌어진 10일 동안 크고 작은 탄피는 바닥을 빼곡히 채웠고 참호를 팔 시간이 없어서 적군의 시체로 개인 참호를 만들었다.
“적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생각뿐이었다. 중대장이었던 나는 수시로 떨어지는 지시에 따라 적을 물리치고 위치를 확보해야 했다. 함께 해준 중대원이 용감하고 치열하게 싸운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다. 살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확인해 보니 160명 중대원 중 30여 명만 살아남았다”
백마고지 전투 당시에도 김 씨는 복부관통상을 당한 상태였다. 6개월 동안 병상에 누워있다 복귀한 후 참여한 큰 전투였다. 6.25전쟁 시작 후 3사단의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김 씨는 포항 근처에서 교전 중 왼쪽 골반뼈 위에 총탄을 맞았다.
긴급 후송된 야전병원에서 응급처치 후 부산의 5육군병원에서 6개월 간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완치가 된 그는 9사단 29연대 소속으로 전선으로 복귀했다.
백마고지 전투가 끝난 후 김 씨는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이북 출신의 상관이 동생을 소개했다. 김 씨는 부산으로 내려가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다.
“아내도 전쟁 중에 군인과 결혼하며 각오를 했었다고 한다. ‘남편이 전쟁터에 나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했었다’고 전쟁이 끝난 후 나에게 말했다. ”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김 씨는 백마고지 전투 후 ‘백마부대’라는 이름을 얻은 9사단 29연대에서 계속 복무했다. 그러던 중 1966년 백마부대 1차 파견부대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당시 중령이었던 나는 부연대장으로 베트남 중부전선의 보급과 지원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았다. 우리 부대의 주둔지는 베트남 닌호아였다. 거기서 1년 동안 복무했다.”
김 씨는 베트남에서 귀국 후 72년 예편했다. 두 번의 전쟁에 참전한 셈이다.
“전쟁 중에는 적군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우가 쓰러져도 슬퍼할 겨를도 없다. 그저 눈앞의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싸울 뿐이었다.” 김 씨는 두 번의 전쟁을 겪은 사람으로 전쟁의 참담함을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김 씨는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젊은이들이 좀 더 정신 무장을 하길 바란다. 또한,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이 있어 오늘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국력을 키우기 위해 힘을 모으고 희생하는 정신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