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GNA)구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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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GNA)구절초
  • 이상철 기자
  • 승인 2023.07.16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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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글로벌뉴스통신]제2회 글로벌문학상 수상작.(수필)

                                                                                    김 태 헌(金泰憲).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거주

 

아버지 손등 주름이 보굿처럼 거칠다. 너덜에 핀 구절초처럼 마디마디가 수없이 꺾이고 굳은살 박인 훈장이다. 구절초는 은은한 향기와 단아한 자태로 풍경을 거느린다. 그윽한 꽃 빛으로 환하게 웃는 자태는 시름조차 잊게 한다. 구절초는 생전의 아버지를 보는 듯 마음 뭉클하게 우려내는 그리움을 지녔다. 서늘바람이 옷자락을 잡아끌면 아버지 따라 약초를 찾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속절없는 삶은 지난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암울한 구름이 우리 집 하늘을 가렸다. 어머니께서 동생을 낳고 몸져 눕더니 바깥 출입도 못하고 병마와 싸우며 점점 지쳐갔다. 시난고난 앓던 병세가 갈수록 깊어져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물만 마셨다. 여러 병원을 찾고 갖은 치료에도 차도가 없었다. 심한 병세로 힘들어 하자 친척이 찾아와 갓 태어난 동생을 아이 낳지 못하는 집으로 보내자고 했다. 착하고 부자로 성실하다면서 적극적으로 권했다. 여동생과 울고불고하며 “밥물을 먹여서라도 키우겠다.”라고 맞섰다. 혹시라도 데려갈까 불안에 잠까지 설쳤다. 

아버지는 약초에 대해서 각별한 애정을 보이셨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틈에도 약초를 캐러 다녔다.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 따라 나섰다. 호기심에 밑두리 콧두리 물어가며 눈에 약초를 익혔다. 이름과 생김새와 약성을 자상하게 알려 주셨다. 엉겅퀴는 뻐꾹채와 산비장이처럼 보라색 꽃과 비슷한 생김새지만, 잎에 날카로운 가시가 나 있다. 용의 쓸개라는 용담, 하얀 꽃이 피는 지초, 곧추선 줄기 꼭대기에 꽃이 피는 삽주는 모양이 특이해서 기억하기 좋았다. 

하루는 약초를 채취하러 간다며 숫돌에 낫을 갈았다. 지게를 짊어지고 시오리가 넘는 길을 나섰다. 아버지를 따라 뽀얀 흙먼지가 폴폴 날리는 신작로를 나부대지 않고 자박자박 걸었다. 계절이 갈마들어 청량한 공기가 대지에 가득 차고 서늘한 기운이 옷섶을 파고 들었다. 가을을 엮어내는 색깔이 깊이를 더했고, 산자락은 고즈넉함을 품어 몽환적인 수채화를 드리웠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유난히 높았고 산허리를 감싸던 구름도 발치 아래에 풍경을 펼쳐 놓았다. 가을꽃은 외로움을 타는지 꽃대가 가늘고 키가 컸다. 가녀린 자태가 눈에 밟히고 올망졸망 풍경조차 멋스러웠다. 벌개미취와 쑥부쟁이, 마타리와 오이풀이 유난히 하늘거렸다. 풀잎마다 이슬이 조롱조롱 맺혀 영롱한 보석처럼 빛났다. 

조붓한 산비탈을 지나는데 풋풋하고 향긋한 냄새가 덜컥 안겨 왔다. 오밀조밀 모여 핀 구절초였다. 하얀 꽃이 어우렁더우렁 어깨동무하며 하늘거렸다. 이제 막 피어난 연보라색 작은 꽃잎으로 하늘을 우러르는 모습이 시리도록 애잔했다. 단오에 다섯 마디로 자라다가, 음력 구 월 구 일 무렵에 아홉 마디로 꺾여 자라 구절초라고 부른다. 이때가 약성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선모초仙母草라고도 하는데, 신선이 키운 약초라고 불렀다. 꽃잎을 입에 넣자 쌉싸름하고 은은한 향기가 그윽하게 가득 찼다. 

베어놓은 구절초를 한곳에 모아둔 것을 보고 등을 토닥여 주셨다. 효자가 병든 어머니를 위해 얼음 깨고 잉어를 잡고, 약으로 쓰려고 솥에 아들을 삶았는데 동자삼이었다는 이야기를 숨죽여 들었다. “효심이 깊으니 엄마가 반드시 나을 것”이라는 칭찬에 눈물이 찔끔 났다. 

열 살 여동생은 앙증맞은 손으로 약탕기를 올려놓고 한약을 달이며 불땀을 살폈다. 나는 틈을 내어 뒷동산에서 솔방울과 삭정이를 주웠다. 구절초를 솥에 넣어 푹 고아 두고두고 드셨다. 가족의 정성과 약초가 병을 낫게 했는지, 어머니는 사 년 만에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구절초는 척박한 곳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며 몸이 꺾이면서도 귀한 약성을 품었다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태양의 정열과 바람의 자유와 땅의 진기를 한곳에 모아 품었다가 소담한 꽃을 피운다. 보라색 작은 꽃이 차츰 연분홍으로 활짝 핀다. 가루받이를 끝내면 티끌 없는 흰색으로 하늘을 우러른다. 꽃이 질 무렵에 다시 청초한 보라색을 띤다. 꽃이 맺혀 피고 지며 색깔 변하는 과정이 우리의 한평생을 보는 듯하다. 

아버지는 구절초처럼 사셨다. 산들바람에 하느작거리는 구절초의 춤사위처럼 곱살스럽게 하늘을 우러렀다. 칠 남매 막내아들로 태어나 세상을 일찍 등진 세 분 형님을 대신하여 할머니와 조카들을 돌보았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도 내색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벼랑 끝 비탈에서 의지가지없는 처지를 감당했다. 외로움을 삭이고 묵묵히 일하며 자신을 돌보지 않고 꺼져가는 어머니를 살려내셨다. 

구절초는 티끌 없는 아버지의 꽃이다, 그리움 품었다가 수수하고 해사하게 우려낸 미소로 눈길을 잡아챈다. 안개에 안긴 구절초가 일렁이고 하늘거릴 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애절하고 애틋하여 뭉클하게 마음 적신다. 은은한 향기 흘리며 단아한 자태로 손짓하는 꽃의 모습에 바람조차 숨죽인다. 

아버지는 당신의 몸에 암세포가 자라는지도 모르는 된서리 맞은 구절초였다. 삭신이 아홉 마디로 꺾이면서도 귀한 약성을 품은 구절초처럼 고결한 삶을 꺾으셨다. 삼십칠 년 전 함박눈이 펄펄 날리던 날. 아버지는 하얀 상여를 타고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나셨다. 구절초의 해맑은 웃음처럼 수수하고 인자하신 웃음만 남기셨다. 갈바람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꽃을 보면 마음조차 먹먹하다. 

아버지 산소를 찾아가는 자드락길에 으밀아밀 구절초가 반긴다. 기품 있어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를 쓸쓸함이 마음 다독인다. 아버지가 도란도란 들려주던 이야기가 구절초의 노래처럼 아련하게 들려온다.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함초롬한 낯꽃이 초연하여 눈시울에 자란자란 이슬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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