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권중달 교수의 역사 칼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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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권중달 교수의 역사 칼럼 (1)
  • 권혁중 기자
  • 승인 2024.12.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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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권중달)권중달 교수
(사진제공:권중달)권중달 교수

[서울=글로벌뉴스통신] 以人爲本 사람이 근본이다

답답하다! 대한민국 70년 동안 어렵고 혼란스러운 날도 많았는데, 지금도 이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피 터지는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 때문에 혼란함이 엄습한다. 야당 대표는 법대로 대통령을 탄핵하였고, 대통령은 사임하는 대신에 그러면 법에 물어보자고 헌재에 가서 적극 대응하겠다고 했으니, 두 사람이 다 헌법재판관들에게 가서 누가 옳은지를 판단해 달라고 한 셈이다.

양쪽이 다 ‘법대로’해 보자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디에서도 국가의 안정과 평화, 국민의 평안과 행복을 생각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 법적 싸움에서 누가 이길지 모른다. 그러나 설령 누가 이기더라도 이렇게 민생을 내팽개치고서 승리하였다고 정말 기뻐할 수 있을까? 동물이라면 힘으로 상대를 이기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역사에서는 인간의 윤리와 도덕적 측면에서 보아 한 번의 승리가 오히려 욕될 수 있는 경우가 너무 많다. 

지도자의 윤리와 도덕은 무엇인가? 설혹 자기 개인은 지거나 손해를 보더라도 국민을 생각하는 모습을 갖는 것이다. 그러한 지도자라면 한 번 지거나 실패하여도 국민의 머릿속에는 국민의 충신(忠臣)으로 영원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다. 그러나 이기더라도 역사에서 국민의 간신(姦臣)이나 혹리(酷吏)로 분류된다면 결코 그 승리가 영광이 아니라 욕이 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니 불현듯 후한(後漢) 말(末) 많은 영웅호걸이 나와서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투는 삼국지에 그려진 영웅들 가운데 유비(劉備)가 조조(曹操)에게 쫓기면서도 자기를 따르는 백성을 버리지 못한 장면이 생각난다.

유비는 능력은 있지만 출신 배경이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의탁할 곳을 찾아다녀야 했던 사람이다. 조조를 피하여 형주(荊州)자사 유표(劉表)에게서 조그만 도읍 하나를 얻어 더부살이하던 때의 이야기다. 그때 유표가 죽고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은 배다른 형 유기(劉琦)를 제치고 아버지가 남긴 형주(荊州)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형과의 싸움으로 쪼개진 힘을 가지고는 영웅들과의 경쟁 속에서 형주를 지킬 자신이 없었는지 형주를 가지고 조조에게 귀부하였다.

이 때문에 유비는 형주를 떠나야 했다. 그의 참모 가운데는 새로 형주를 맡은 유종은 세력이 약하니 그를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하고 조조와 대결하자고 권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잇속만 치자면 이 말이 맞는다. 그러나 유비는 자기가 어려울 때 기거할 자리를 제공한 유종의 아버지 유표의 은덕을 배반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먹고 먹히는 싸움의 한 복판에서도 이익을 위해 배반하는 것은 안 된다는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손해를 보면서도 윤리와 도덕을 지킨 것이다.

유비는 조조가 남으로 내려오면 제일 먼저 점령할 곳이 강릉(江陵)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관우에게 수백 척의 배를 가지고 빨리 강릉에 가서 이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전략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형주를 떠나기 전에 자기에게 은덕을 베푼 유표의 묘소에 가서 작별을 고하였다. 인간적인 예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유비의 인간적인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유비가 양양(襄陽)을 지나 당양(當陽)에 도착하였을 즈음에는 형주를 이어받은 유종에게 실망한 유종의 좌우에 있던 사람과 형주의 백성들 가운데, 형주를 떠나는 유비에게 귀부한 사람이 10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유비는 10만 명을 얻었지만, 이것은 군사가 아니라 일반 백성이 뒤섞인 군중일 뿐이었다. 이들은 짐수레까지 끌고 따르니 움직이는 속도는 하루에 겨우 10리였다.

한편 조조는 유비가 강릉을 먼저 장악할까 걱정하여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하루에 300리의 속도로 유비를 추격하게 하였다. 하루에 10리를 움직이는 유비의 군중은 하루에 300리를 움직이는 조조의 정예기병과 싸우게 된 셈이다. 이러한 상태를 본 유비의 참모는 유비에게 권고하였다. “의당 속히 가서 강릉을 보존하여야 합니다.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있지만 갑옷 입은 사람은 적으니 조조의 군사가 이르면 어떻게 이를 막겠습니까?” 따르는 10만의 무리를 버리고 먼저 강릉으로 가라는 권고였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 말은 백번 맞는다. 그러나 유비의 대답은 달랐다. “무릇 큰일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 많은 사람이 나에게 귀부(歸附)하였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이들을 버리고 떠나겠는가?” 

유비는 불리한 것을 알았지만 끝내 자기를 따르는 군중을 버리지 못하였다. 이것이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기는 하지만 결국 장비(張飛)가 장판교에서 조조 군과 맞싸웠고, 유비의 군사는 대패하였다. 질 것을 알고 진 셈이다. 유비의 손해는 막대하였다. 그의 아들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 정도였으니 말이다. 만약에 유비가 자기를 먼저 생각했다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데리고 안전하게 먼저 강릉으로 갈 수 있었겠지만 그러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기를 조금 지나서 남으로 내려오려는 조조를 유비는 손권(孫權)과 힘을 합하여 막아냈다. 그것이 유명한 적벽(赤壁)대전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조조를 형주(荊州)에서 막은 뒤에 유비는 형주를 손권과 둘이서 나누어 차지하였다. 형주에서 더부살이하던 유비가 원래 형주의 주인인 유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자기 힘으로 형주의 반을 차지한 것이다. 이를 발판으로 유비는 촉(蜀)으로 들어가서 후에 촉한(蜀漢)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가인 습착치(習鑿齒)는 유비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평론하였다. “유현덕(劉玄德, 유비)은 비록 좌절하고 험난하였으나 신의(信義)는 더욱 밝았으니, 형세가 긴급하고 일이 위태로워도 말함에 도(道)를 잃지 않았다. 유경승(劉景升, 유표)의 옛 은혜를 추념하니 삼군(三軍)을 인정(人情)으로 감동시켰으며 대의(大義)를 따르는 선비를 사랑하였으니 기꺼이 함께 실패하려 하였다. 그러나 끝내는 대업을 이룬 것은 역시 마땅하지 않겠는가!” 유비가 촉한을 세우고 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백성을 생각하는 그의 윤리와 도덕 때문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지도자인 대통령과 야당대표는 두 사람이 똑같이 ‘법대로’ 하니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하면서 헌법재판관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별안간 헌법재판관의 판결을 기다리게 되었으니 이미 스스로 지도자의 자리를 버린 것이다. 대정치가로서의 금도(襟度)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지도자로 믿은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두 사람이 비록 여야의 영수이기는 하지만, 자질구레한 법조문을 따지는 것으로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니 기대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지도자가 되기로 했다면 시작은 법으로 하였다고 하여도 인간학, 인문학적 사고를 보충해야 했던 것은 아닌가?

군대에서 General이 된다는 것은 각자 출발할 때의 병과(兵科)를 넘어서서 자기 개인이 갖는 병과가 없어지는 것처럼, 진정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이제라도 인문학적 사고로 General이 되어서 ‘사람을 중심에 두는 행동’을 한다면 헌법재판관의 판단에 따라 이기든 지든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남는 승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권중달(중앙대 명예교수, 삼화고전연구소 소장)

 

*주)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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