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기념관, 5월의 독립운동가 ‘문창학’ 선생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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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 5월의 독립운동가 ‘문창학’ 선생 선정
  • 송재우 기자
  • 승인 2016.04.2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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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다시 태어난 독립군
   
▲ (사진제공:독립기념관) 눈물 젖은 두만강의 소재가된 두만강 전경

[천안=글로벌뉴스통신]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문창학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고 공훈을 기리는 전시회를 다음과 같이 개최한다.

문창학은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이다. 1919년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 12월 러시아에서 조직된 임시대한독립군에 가입하였다.

1922년 동료대원 14명과 국경을 넘어 일본 해군기지인 함경북도 웅기항(雄基港)을 공격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국경 경비가 강화되어 인근의 신건원주재소로 목표를 변경하였다. 문창학은 1월 5일 밤 12시 40분 경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하여 불빛으로 주재소의 위치를 대원들에게 알렸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대원들은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일본인 순사 1명을 사살하고, 주재소의 숙소를 파괴하였다. 일본 군경이 반격해오자 폭탄 2개를 투척하고 퇴각하였다.

문창학을 비롯한 대원들은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 혼춘(琿春)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일본 군경에 대한 공격과 밀정 처단을 계속하던 중 1922년 12월 동료 대원 13명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 함경북도 청진부 청진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23년 5월 25일 대원 14명에게 각각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은 문창학과 김학섭은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재판은 9월부터 약 두 달 동안 경성복심법원에서 계속되었지만, 결과는 끝내 바뀌지 않았다. 문창학은 다시 사형을 선고받고, 1923년 12월 2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문창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란 노래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눈물 젖은 두만강」을 만든 이시우가 중국 도문(圖們)의 한 여관에 머물 때였다. 그가 여관방에서 빼앗긴 조국의 아픔을 노래하는 악보로 고민하고 있던 중 우연히 한 여인의 애절한 통곡 소리를 듣게 된다. 그 소리는 문창학의 아내 김증손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남편에게 술 한잔을 올리다가 낸 울음소리였다. 그날은 바로 죽은 남편의 생일 날이었다. 이튿날 이시우의 눈에는 말없이 흐르는 두만강의 푸른 물결이 나라를 잃고 헤매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피눈물처럼 보였다고 한다.

독립기념관에서는 문창학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자 별도의 전시코너를 마련하고 관련 자료를 5월 한 달 동안 전시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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