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태부인경수연도’ 등 2건 보물 지정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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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태부인경수연도’ 등 2건 보물 지정 예고
  • 권혁중 기자
  • 승인 2013.07.1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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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칠태부인경수연도’와  ‘묘법연화경 권4~7’ 등 2건의 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10일 지정 예고하였다.

  ‘칠태부인경수연도(七太夫人慶壽宴圖)’는 왕의 명령과 보조를 받아 70세 이상 모친을 모시고 있는 신하 7명이 1691년 8월 경수연(慶壽宴, 장수를 축하하고자 베푼 잔치)을 치른 후 기념으로 제작하였던 것을 1745년 이전 어느 시점에 새롭게 제작한 작품이다. 경수연도는 양로(養老)를 중시한 조선시대 대표적 사가행사도(私家行事圖)의 일종이다.

 이 작품은 후대 모본(模本)이지만 유연하면서도 차분한 필선, 변화 있는 세부표현, 행사 내용의 요약적인 전달력 등을 갖추고 있어 회화적으로 우수한 행사기록화로 평가된다. 또 강세황(姜世晃, 1713~1791년)의 33세 때 글이 포함되어 있어 작품의 제작시기를 분명히 알 수 있고, 희소한 강세황의 30대 초반 필적을 볼 수 있는 점도 의미가 있다. 칠태부인경수연도는 현전하는 경수연도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 가운데 하나로 주목된다.

  ‘묘법연화경 권4~7(妙法蓮華經 卷四~七)’은 불교의 대표적인 대승경전(大乘經典)으로 조선 태종 5년(1405)에 전라도 도솔산 안심사(安心社)에서 성달생(成達生, 1376-1444년)과 성개(成槪, ?~1440년) 형제가 필사한 것을 새긴 목판본 전 7권 가운데 권4~7의 1책이다.

 발문에 따르면, 태종 5년(1405) 3월 권근(權近, 1352~1409년)이 종래의 묘법연화경의 글자가 작아 독송이 어려운 까닭에 중간 크기의 글자로 필사 후 간행하여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리하게 볼 수 있게 하였다.

 판각은 대화주 선사 명회(大化主 禪師 明會) 등의 주도하에 총지종 대선 자옥(摠持宗 大選 慈玉), 우산군부인 김씨(兎山郡夫人 金氏) 등이 발원․시주하여 이루어졌다. 간행사실을 밝히는 권근의 발문을 갖추고 있어, 조선 초기의 불경 간행 방식을 알 수 있는 등 서지학(書誌學)과 불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유물 2건에 대해, 30일간의 지정 예고 기간 중 수렴된 각계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연번

종별

문화재명

수 량

현소재지

소유·관리자

1

보물

칠태부인경수연도

1축

부산 남구

공유

(부산광역시시립박물관)

2

보물

묘법연화경 권4~7

4권 1책

경남 창원

개인

◆권근(權近, 1352-1409.호 양촌)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인 권근은 공민왕 원년(1352년) 안동 권씨 가문에서 검교 정승 벼슬을 한 희(僖)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7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18세에 문과 전시에 급제하여 춘추검열에 제수되는 등 일찍 터득한 학문과 함께 벼슬길에도 발빠르게 나가기 시작했다. 일화에 의하면 당시 공민왕은 18세의 어린 나이의 권근을 전시에 급제시켰다 하여 노여워하였는데 스승인 이색이 장차 크게 될 사람임을 적극 변호하여 등용했다고 한다.

 그는 34세에 성균관 대사성에 올라 성균관 시험을 관장하는 등 학자로서 현실 정치인으로 크게 활약을 했다.창왕 때 좌대언, 지신사를 거쳐 밀직사첨서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정책을 주창했고, 우왕 원년에는 원나라에서 오는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성품이 곧고 직간을 서슴지 않았는데 모함을 받아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경학에 몰두하여 전라도 익산에서는 우리 나라 처음으로 경서를 그림으로 풀어가며 해석을 붙인 당대의 명저 `입학도설(入學圖說)`을 완성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장형광 등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익산에서 귀양살이가 풀리자마자 다시 충주 양촌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경학사상을 정립하여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을 저술하였다. 후일 퇴계 선생은 "양촌의 학문이 깊고 넓음은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을 저술한 것으로 증거 된다"고 퇴계집에서 밝혔다.

 이성계가 정몽주 등 고려의 유신들을 제거하고 조선을 개국하자 권근도 고려에 대한 충절이냐, 새 역사의 흐름에 동참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에 행차하는 길에 양촌에 묻혀 사는 권근을 불러 정도전과 함께 조선 왕조를 개국하는 두 개의 기둥으로 삼았다.

 평소 존경하던 정몽주, 이색 등과길을 달리하여 두 왕조를 섬기게 된 권근을 두고 후세에도 평가를 달리하였는데 일화에 의하면 조선 중종 때이름 높은 송인수, 김안국 두 학자가 어느 집에서 권근의 초상을 보게 되었는데 송인수는 "절의를 꺾은 사람"이라고 절을 하지 않았고, 김안국은 "이 나라 도학에 크게 공헌한 분"이라고 절을 했다 한다.

 그는 태종 1년 좌면공신 1등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 의정부찬성사를 거쳐 세자좌빈객 세자이사 등을 역임하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권근은 당대의 우뚝한 학자로서 900수가 넘는 시를 지었으며, 금강산, 탐라 등 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동문선에는 그의 시문이170편이나 실려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경학과 시문으로 한 시대를 만든 권근이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조선조선비들은 그가 절의를 굽혔다고 하여 서원(書院) 하나 짓지 않았고 향사(享祀)에도 모시지 않았다. 지금 묘소아래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1985년 후손들에 의해서 지어진 것이다. 추원재 입구 마당에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地圖)는 태조 4년에 권근이 만든 천문도로 국보 228호로 지정된 것의 모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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