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최 송설당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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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최 송설당 여사
  • 송영기 기자
  • 승인 2018.01.05 0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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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글로벌뉴스통신]

 

  최 송설당(崔 松雪堂) 여사 *

- 金泉高,송설학원 교주(松雪學園 校主)

 

관향(貫鄕)이 화순최씨(和順 崔氏)갸륵한

장녀(長女)로서,

어버이 뜻 받들고 연꽃처럼 피어나서,

아들도 못할 일들을 해내고야 말았네.

 

어려서 학문익혀 시문(詩文)*에도 능(能)

하였고,

두텁게 이재(理財)하여 큰재물* 이루나니,

당차고 어진 심성에 신령님도 복을주네.

 

귀인(貴人)*을 받드는 데 지극정성 다하시어,

일거에 믿음주고  왕실(王室) 총애  받으시니,

무교동 큰 기와집은* 정승보다 나았네.

 

북한산 속리산과 청암사의 바위돌*에,

송설당 이름새겨 세월속에 묻어두고,

대찰(大刹)의 수많은 법당에 촛불켜서

불 밝혔네.

 

조상도 신원(伸寃)*하고 석숭(石崇)처럼

만재(萬財)*쌓아,

육영에 뜻을펴라  어머니의 당부* 따라,

기꺼히 마음 정하니 망설임이 없었더라.

 

고성산 송정(松亭)에다 정걸재(貞傑齋)*

지으시고,

산아래 강당*짓고 붉은벽돌 본관(本館)*준공,

우람한 송설학원이 김천고을에 설립됐네.

 

재물을 아꼈으면 삼대(三代)는 갔겠으나,

인재(人材)를 기르는데 정재(淨財)*를 쾌척하니,

갈마든 학생 자식들이 한 나라에 가득하네.

 

마음껏 뜻 펼치고 활불(活佛)*로서 사셨으니,

장부(丈夫)*가 됐다한들  미치지를 못하리라.

교정(校庭)에 할머니동상(銅像)* 창송(蒼松)

아래 우뚝하네.

                  

    都雲(도운) 宋永起/시조시인,서울
 

(註) 

* 최 송설당 (崔 松雪堂) 여사 : 화순 최씨 和順崔氏 (1855 -1939)

아버지 최창환(崔昌煥)과 어머니 정씨(鄭氏)의 3녀중 장녀로 태어남.

달 밝은 밤에 하늘에서 황학을 타고 흰옷입은 노인이 내려와 붉은 글씨로

쓴 책을 받은 태몽을 꾸고 잉태하니,아들 이기를 기대 했다함.

효녀에다가 인물이 곱고 부지런하고 총명하나, 적몰(籍沒)된 역적의 집안

이라는 누명으로,혼인을 하기보다는, 여인의 몸이지만 장차 가문을 다시세워

일으켜 조상의 억울함을 벗기고자 큰 뜻을 정한 것으로 보임.

님은 1855년 8월 29일에 태어나시고,1939년 6월 16일에 81세로 천수를 다함.

 

 * 시문 (詩文) : 

한문에 능하여 한시 259수,국문가사 50편 남김.

송설당집 전질 3권 2책 간행(1921.12월)

 

* 큰 재물 : 

환갑을 한해 앞둔 1866년 6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상을

마친뒤 송설당 나이 40세에 근검절약하여 일군 4백석하는 논과

밭의 거대한 재산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상의한 후,제2의 인생길

큰 전환기로 들어간다.

"양지바른 나뭇가지가 춘심(春心)을 얻는다" 며,조상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천은(天恩)을 입기위한 바른 길로,서울에 올라가기로 결심. 

그리하여  그후 1901년에 몰적(沒籍)에 대한 복권이 내려 선조의 설분

 (雪憤)을 신원(伸寃)하고, 대대적으로 조상들의 묘소를 찿아 비석을

 세우고 위토답(爲土畓)을 크게 마련,종친회를 구성하여 제향(祭享)케

하였다 함.                

 

* 귀인(貴人) : 

고종황제의 상궁으로 후궁이 된 엄귀비(嚴貴妃)를 모시었고,

영친왕 이은(李珢),즉 황태자 영왕의 보모가 됨.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서울에 올라 갈때 김천에 잠시

정차,송정의 정걸재에 들려 송설당 보모를 만나보고 갔다함.

 

 * 큰 기와집  : 

송설당의 국문가사에 "서북창문 열어놓고 인왕북악 바라보니" 라는 

시에 보듯, 서울 덕수궁 근처 무교동 94번지에 지은 저택인

큰 기와집(약 200평)의 당호가 송설당(松雪堂)이라함.

문집에도  " 눈발을 을 딛고 일어선 소나무처럼 살았기에 감히

松雪堂이라 自號 한다" 는 기록으로 봐서,고종황제가  지어준

호는 아닐것으로 봄.

그리고 "삼동(三冬)에도 타고난 성품을 더럽히지 않는 눈속의

소나무(雪中松)" 으로,평소 청송백설(靑松白雪)의 고고한 자태와

절개를 애호 하였다.

송설당의 백설(白雪)이란 시에 이런 싯귀가 있다.

 

" 창송(蒼松)하에 비껴 앉아 설경산천 바라보니,

천수만수 가지가지 춘색(春色)이 난만하고,

기중에 독립창송(獨立蒼松) 더욱이 유색하여,

양춘(陽春)을 화답하니 만고불변 송설(松雪)인가 "

                                                                         

* 암각서 (岩刻書) : 

시주 불사(佛事)한 전국 명산대찰 즉,금강산,북한산,속리산

복천암, 경북 청암사등에 있는 큰 바위에 최송설당(崔松雪堂)

호를 음각(陰刻)하여 새겨두니,그 바위가 더 아름답게 보임.

       

* 신원 (伸寃) : 

증조부의 외가가 홍경래 난에 가담하여 그 화가 최씨일문에

미쳐 증조부가 옥사하고,조부는 전라도 고부(古阜)로 귀양감에

부친 최창환과 그 어머니가 함께 따라 갔었다.

귀양지에서 조부가 별세하자 부친이 김천으로 이사와 정착한후

최송설당을 낳았다.

그런 연후로 인근 지방 사람들은 최송설당을 일컬어"고부 할머니"

또는 "고부 할매"라 불렀다.

 

* 석숭같은 만재 (萬財) : 

1929년도에 부동산이 20만 1천 1백원이고,저금이 32만원

(현재시가 100억원)을 제공 하여 학교 설립을 신청하여 1931,2.9 에

재단법인 송설학원이 등록, 3.17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인가됨.

처음에는 조선 총독부가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인재배출을 우려하여

인문학교 설립신청을 인가하지 않고 실업학교 전환을 종용/회유하다가, 

최송설당의 완강한 거부와 불퇴전의 노력으로 인문학교에 실업학교

교과를 가미완화하여 설립허가를 하였고,또한 그 당시 총독부 관원들도

송설당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교류하는 고관부인들도 존경한것으로

보임.

그리고 고하 송진우,만해 한용운, 방응모,이인,몽양 여운형등 한국의

큰 인물들과 교류하였고, 유명 신문들이 다 칭송 할 정도의 치마두른

여걸(女傑)이요 여장부(女丈夫)였다.

 

* 어머니의 당부 : 

송설당이 61세 되던해, 어머니 정씨가 "이제 네가 할일은 네 전재산

(全財産)을 교육사업에 바칠 일이다" 하시고 80세에 돌아 가셨다.

 

* 정걸재 (貞傑齋) :

김천시 부곡동에 먼저 준공된 강당을 임시교사로 1931.5.9 에 개교하고, 

5학급증설 위해 서울 자택과 가구 및 값진 물건 일체를 팔아더 내 놓아 

붉은 벽돌 2층 본관을 세움.

그리고 학교뒤 고성산(孤城山) 아래의 송정(松亭)에 궁궐짓는 수준높은

대목수(大木手)의 솜씨로 새로운 서재 정걸재를 지어 만년(晩年)에

에 기거했고, 그 옆에 있는 취백헌(翠白軒)은 안채로 쓰임.

 

* 강당과 붉은벽돌 본관 : 

몽양 여운형 선생이 개교식에 참석, 김천고을에 세워진 학교의

우람한 건물을 보고서, 축사 하기를 김천고보는 " 영남의 오아시스" 라 했다함.

 

* 활불(活佛) : 평소에 전국 여러 큰절에 시주(施主)를 많이 하고 

절을 수축하는 등 불심(佛心)이 돈독하여, 살아있는 부처(活佛)라 했다함.

 

* 장부(丈夫) : 

송설당의 한글가사 술지(述志)의 내용중에 이런 구절이 있어,

다음 생(來生)에는 사내로 태어나 출사(出仕)하여 어진 임금을 만나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남기고 싶다 노래하니,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인간 삼락(人間三樂) 좋다한들 내몸이 아녀자 되고,

삼종지의(三從之義) 지중하나 내 몸에는 관계없다.

이 세상에 쌓인 한을 영명하신 상제(上帝) 전에,

차례차례 발원(發願)하여 백두산 아래 남쪽나라,

삼천리 화중세계 효자충신 적선가(積善家)에,

장부(丈夫)몸으로 태어나서 사서삼경 육도삼략,

요순우탕(堯舜禹湯) 임금만나 국가사업 다한 후에,

동서양의 위인으로  유방백세(遺芳百世) 하여볼까 "

 

* 동상 (銅像) :

자기의 전재산을 몽땅 바쳐 학교를 설립하니,그 위대한 정신을 기려

1935.11.30 개교 4주년 기념식날 교내에 동상을 설립하여 송설당에게 헌증함.

 

* 최송설당의 유지(遺志)로 본 건학정신(建學精神) :

永爲私學  涵養民族精神  一人定邦國  一人鎭東洋  克遵此道  勿負吾志

 (길이 학교를 유지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하라, 한 사람이 나라를 바루고

한 사람이 동양을 진정케 하나니,이 길을 따르고 지켜 내 뜻을 버리지 마오)

 

*  송설당의 한시(漢詩) 소나무 (松) :

담장안에 심은 소나무 한자 남짓하여,가지와 잎 몇성상 겪었느냐고 물었더니,

내 나이 이미 늙음을 비웃기나 한듯, 다른날 동양(棟樑)됨을 보지 못하리라네.

 

(* 참고문헌 : 

松雪堂集 2. 崔恩喜의 글-최송설당 잊지못할 여류명인,영남일보1975.9.3,

한국일보 1981.5.24, 송설 60년사 1991.12.31 , 보리숭이의 방 -송설장학회)

 

(김천 부곡동 송정에 있던 서재, 정걸재에서 여섯명의 수임이사들과 최송설당 여사)

 

(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쓴 여장부 최송설당 모습)

 

 

(김천고 본관 옆에 세운 최송설당 동상)

 

 

(금릉 김현철/ 金陵 金賢哲 화백의 최송설당 초상화- 김천고 역사 박물관 소장)

 

(사진 촬영 :  송영기 기자 - 송설 60년사 도록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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