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전등화 대한민국을 살린 국가영웅은 보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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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전등화 대한민국을 살린 국가영웅은 보상해야
  • 권혁중 기자
  • 승인 2015.09.2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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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참전유공자 평균 85세,예우에 최선을 다해야
   
▲ (사진:글로벌뉴스통신 권혁중)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

[국회=글로벌뉴스통신]새누리당은 9월24일(목)오전 국회대표최고위원실에서 최고위원회의를 개최하였다.

   
▲ (사진:글로벌뉴스통신 권혁중)김을동 최고위원.

김을동 최고위원은 "국가를 위해서 헌신, 봉사한 사람은 절대 국가에서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는 6.25전쟁 발발한지 65년 되는 해다. 참전유공자가 생존해 계시는 분들도 평균 85세 연령이며,명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셔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참전유공자들 중에서 기초생활수급자가 약 1만명 정도 된다. 그런데 현재 지원되는 액수가 18만원 정도 참전수당이 있고, 그 다음에 지자체별로 지급하는 명예수당, 그리고 보훈병원 진료비 60% 감면이 전부다 그런데 65세 일반국민의 기초연금도 20만원 정도로 알고 있는데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석하신 분들에게 드리는 참전명예수당이 기초연금보다도 못하다는 것은 정말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국가보훈처는 적극적으로 국가유공자 예우에 앞장서야 한다. 또한 정부도 국가유공자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는다는 정말 뚜렷한 철학을 가지고 이분들이 영예롭게 살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당부 드린다."라고 하였다.

   
▲ (사진:글로벌뉴스통신 권혁중) 박승춘 국가보훈처장.(9.18.국회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출석)

아래 내용은 글로벌뉴스통신이 단독으로 발굴하여 취재한 내용을 기록했다.

김유각(86세)옹이 ㅂ 前대학교수와 동행하여  9월20일(일)국회를 찾아왔다.

ㅂ 前대학교수는 "정봉욱 장군(소장 예편)과 김유각 선생의 용단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패망을 했다."고 주장하였다.

1950년 8월15일 김일성의 '모든것을 전선으로'라는 명령으로 북한군은 '무정'이가 이끄는 북한군3개 사단과 예비사단 등 약 5만명이 화력을 집결시켜 대구 다부동에서 대치,아군에서는 열세인 백선엽 장군의 장병과 학도병 15,500명이 최후의 일전을 감행하려 했다.(참고서적:이중근 편저. 6.25.전쟁1129일.우정문고.2014.11.10발행)

북한군  '무정'(당시 북한1군단장)이가 각 지휘관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말하기를 "현재 대구와 부산에는 수십만명의 피난민과 경찰 국군잔당 정부요인들이 개미떼처럼 몰려 있다.인정 사정없는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밀물처럼 밀고 들어가 대구 부산을 접수하여 항복을 받아낸다.시각은 내일밤 8시다. 이에 철저히 대비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때에 초특급 정보를 가진 인민군 제13사단 13포병연대장 정봉욱 중좌는 연락병인 김유각 상병에게 귓속말로 '넌 어쩌면 좋겠냐?'묻기에 '고개를 좌우로 흔드니까 ' 정봉욱 중좌는 "우리 여기서 튀자."라고 하여 함께 두손을 잡고 어두움을 뚫고 나와 백선엽 장군에게 투항하고 귀순하였다.

투항하고 작전지도와 초특급 살육작전정보를 제공하니 백선엽 장군은 미국 워커 장군에게 사실을 알리고 워커장군은 맥아더 극동사령관에게 긴급타전하여 B29폭격기 98대를 총동원하여 가솔린을 분사하고 융단폭격하여 북한군'무정'이의 5만명의 군대를 괴멸시켜서 '무정'이와 4명의 사단장도 폭사했는데 이날이 1950년 8월22일 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의인(義人) 두사람의 귀순으로 다부동 전투는 국군이 대승하여 인천상륙작전도 용이하게 이루어져서 의주까지 진군하였으나, 중공군 30개 사단의 개입으로 통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진군도중 김유각 옹과 정봉욱 장군은 잠시 고향을 들러보니,"정봉욱 장군 가족 10여명과 김유각 옹의 부모,3명의 형과형수 조카까지 모두17명의 두손과 발을 묶고 산채로 불에 태워서 공개 처형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김유각 옹의 주장에 의하면 "두 사람이 귀순한 날에 육군본부에서 삐라까지 뿌려서 확성기로 정봉욱 연대장과 김유각 연락 상병이 귀순했으니 너희들도 살고 싶으면 빨리 투항하라고하여 화근이 되어서 가족이 공개 처형되었다.가족들이 행불처리만 하고 조용하게 했으면 가족이 전부 몰살되어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후에 1950년12월29일 국군에 편입되어 정봉욱은 중령으로 입대하고 김유각은 하사로 입대하였다.

이 갸륵한 대의를 당시에 박정희 장군이 크게 받아드리고 두터운 신임과 총애를 하여 3년6개월동안 측근에서 보좌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유아일때 대구에서 서울 성북동까지 살림도구와 육영수 여사,외조부 세명을 김유각 하사가 GMC를 직접운전하여 안전하게 모셔다 드렸다.

김종필,박종규,이후락 등과 5.16혁명을 같이한 정봉욱 장군은 7사단장,고사포연대장,3군사관학교장,논산훈련소장을 역임하고 소장으로 퇴임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후에는 "간첩들의 독침이 무서워 현재까지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유각 옹은 "박정희 대통령이 준장시절에 상무대 포병학교 근무시 주선하여 결혼도 시켜주어 처가댁인 전남 장성에서 콘테이너박스를 개조하여 어렵게 살고 있다.참전수당 월15만원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행한 ㅂ 前 대학교수는 "많이 늦었지만 국가는 사실관계를 조사하여  정당하게 의인들에게 포상하고 합당한 대우를 하여 여생을 보람돠게 마치도록 해야한다.데모하던 사람도 훈장을 주는 세상이고, 수학여행가다가 배가 수장되어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국가에서 지급하는데  형평성이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ㅂ 前 대학교수는 "의로운 인물이 세계전사에도 길이 남을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다부동 (왜관과 영천사이)에는 의로운 역할을 한 공적비를 세워야 함은 물론, 가족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 오랜 기간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온 분들을 위하여 국가가 보상을 해주어야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 (사진:글로벌뉴스통신 권혁중) 김유각 옹(86세)이 인터뷰후에 사진촬영에 임하였다.

기자는  9월20일(일) 오후5시 김유각 옹과 동행하여 정봉욱 장군의 거처를 방문한 결과 92세에 비교적 건강해 보였으며 부인과 사별하고 홀로 식사를 하면서 가끔씩 자녀들이 식단을 준비하고 있음을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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